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인 상징과 주제를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름을 잃는다’는 설정부터 욕망, 기억, 음식, 정체성까지, 각각의 요소는 철학적 의미를 지닌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본 리뷰에서는 이 작품을 사후세계의 은유로 해석하며, 이름의 상실, 기억의 회복, 먹는 행위라는 세 가지 중심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찰해 봅니다.
욕망의 도시와 정체성의 상실: 이름을 빼앗긴 아이
작중에서 치히로는 부모와 함께 새로운 마을로 이사 도중 이상한 터널을 통과해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은 겉보기에는 활기차고 다채로운 온천 마을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망각의 세계’입니다. 치히로는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온천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이 설정은 단순히 가명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치히로라는 존재 자체가 소거되는 상징적인 장치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닌, 존재를 기억하고 정체성을 지탱하는 근본입니다. 이름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를 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유바바는 이 세계의 지배자이며, 이름을 빼앗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조종합니다. 그 세계에 들어온 이들은 모두 ‘이름 없음’의 상태에 가깝고, 결국 유령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치히로는 스스로 “나는 치히로야”라고 반복하며 자기 이름을 되새기는데, 이는 망각의 세계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저항의 표현입니다. 유령이 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지는 일이며, 미야자키는 이를 어린 소녀의 여정 속에 깊이 담아냈습니다. 이 세계는 일종의 사후세계이자 기억을 시험하는 장소이며,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끝까지 붙잡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무너지지 않고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하쿠, 강, 기억: 흐름과 존재의 회복
하쿠는 치히로와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자신의 정체성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은 치히로가 어릴 적 빠져 죽을 뻔했던 강의 정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인 ‘기억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쿠는 치히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흐릿한 존재이며, 치히로는 점차 그 기억을 되살려 하쿠의 본래 이름인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를 떠올립니다. 이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쿠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유바바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서사는 단순한 구출이나 해방이 아닌, 잊혔던 존재를 다시 부르고 불러내는 ‘존재의 귀환’입니다. 기억을 통해 존재가 다시 만들어지는 이 구조는, 죽음과 망각을 넘어서기 위한 인간의 내면적 싸움을 은유합니다. 강이라는 이미지는 ‘흐름’, ‘정화’, ‘귀소본능’의 상징이며, 하쿠는 그 물 위에 잊힌 정체성과 존재의 회복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갈등하고 고뇌하며, 결국은 치히로의 기억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기억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규정짓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이며, 이 영화는 그러한 기억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음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무얼 먹고살아야 하는가: 식사와 ‘사후세계’의 상징
이 영화에서 음식은 단순한 영양섭취를 넘어선 상징적 도구입니다. 부모가 욕심을 내어 허락 없이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해버리는 장면은, 인간이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어떤 형태로 존재가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직관적인 상징입니다. 반대로 치히로는 초반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점차 투명해져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이는 음식이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이 세계의 일부가 되는 의식’ 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느냐입니다. 치히로가 카마지에게서 받은 찐빵, 린과 함께 나눈 식사, 하쿠에게 준 쓴 약초 모두는 정화와 회복의 기능을 합니다. 노페이스 역시 음식을 먹고 존재를 확장하려 하지만, 결국 그것은 타인의 욕망을 먹는 방식이었고 자아를 잃게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영화는 ‘먹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정체성과 경계를 설정하며, 음식을 매개로 생존과 망각, 욕망과 해방 사이의 줄타기를 묘사합니다. 치히로는 끝까지 스스로 절제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음식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결국 자신과 타인을 구하는 방식이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기억되는 자’로 남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살아 있는 자로 남기 위한 행위입니다.
결론: 기억을 지키는 자가 삶을 이어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단순히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죽음과 망각, 존재의 해체와 회복을 둘러싼 철학적 질문들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이름은 정체성, 기억은 존재의 실체, 음식은 삶의 태도를 상징하며, 이 모든 상징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치히로는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싸우고, 타인의 존재를 기억해줌으로써 그들을 구하며, 결국 이 세계를 떠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 작품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겪게 될 ‘기억의 소멸’이라는 문제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싸움은 단지 치히로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이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하게 합니다. 바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순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