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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 신화적 존재가 마주한 인간성의 본질

by 1to3nbs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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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새로운 흐름을 연 영화 《이터널스》(2021)는 단순히 강한 힘을 지닌 초월자들의 이야기 그 이상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지켜본 신화적 존재들이 이제 인간의 곁에서 삶과 감정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전 마블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리듬과 철학을 통해 ‘신은 왜 인간처럼 흔들리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광활한 황무지 위에 서 있는 고대 신화적 존재 3명. 검은 망토를 입고 인간 도시를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

신의 시선에서 본 인간: 관찰자에서 공존자로

이터널스는 본래 ‘관찰자’였습니다. 셀레스티얼의 명령에 따라 인류를 돕되, 전쟁이나 재난에는 개입하지 않는 수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인간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그들은 점차 ‘무감정한 존재’에서 ‘공감하는 존재’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카리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고뇌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완수하려는 충성심과, 세르시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의 눈빛은 차갑지만, 그 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죄책감과 사랑의 흔적이 서려 있습니다.

세르시는 그와는 반대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사명보다 인간의 감정에 더 민감하며, 인간적인 삶을 택합니다. 그녀의 선택은 마블 세계관 속에서 ‘약한 자의 강함’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이터널스는 신화적 힘을 지닌 존재들이 인간과 함께 삶을 나누고, 고통을 공감하며, 결국 인간과 동일한 고민에 빠져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그들은 단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인간성을 배우는 자’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서사적 변화는 마블의 전통적 히어로 문법을 넘어서,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초월자에게도 필요한 윤리: 자유의지와 책임의 경계

이터널스는 단순한 선악의 대결이 아닌, 목적과 윤리 사이의 균열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셀레스티얼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지구를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진실을 마주합니다. 이 계획은 신적 존재인 그들에게는 필연적인 순환처럼 여겨지지만, 인간성과 접촉한 이터널스에게는 윤리적 딜레마로 다가옵니다. 도덕적 우위란 무엇인가? 더 많은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현재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는 단지 영화 속 사건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통렬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약은 이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셀레스티얼의 뜻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선택을 세르시에게 넘깁니다. 이는 ‘권력의 위임’이자, 자유의지를 통한 윤리적 전환입니다. 또한 드루이그는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폭력을 제어하고자 하며, 킹고는 정반대로 ‘자신은 판단하지 않겠다’는 중립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 다양한 태도들은 이터널스라는 집단이 단일한 도덕적 중심을 갖지 않음을 보여주며, 오히려 인간 사회처럼 복잡하고 충돌하는 세계관을 가진 존재들임을 드러냅니다. 이터널스는 신적 존재이지만, 그들도 윤리적 선택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정은 이들이 ‘선택의 대가’를 감정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적 존재로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신화를 해체하는 연출: 감정 중심의 히어로 서사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이터널스》는 이전 마블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출 스타일을 선보입니다. 전투 장면보다는 고요한 시선과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카메라워크, 인공 조명보다는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상미가 돋보입니다. 광활한 사막, 푸른 초원, 유적지의 잔해 속에서 인물들은 침묵 속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전투보다는 질문에 머물고, 대사보다는 시선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자오 감독은 전형적인 히어로 서사에서 벗어나, 시적인 시공간과 잔잔한 감정을 통해 신화적 존재의 인간화를 이끌어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드루이그가 군중의 폭력을 멈추고, 침묵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퀀스입니다. 카메라는 드루이그의 눈동자를 천천히 따라가며, 그의 내면에서 어떤 감정이 떠오르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구성합니다. 또한 이카리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떠나는 순간, 카메라는 그를 멀리서 조용히 따라갑니다. 마치 신이 아닌 한 인간의 슬픈 퇴장을 기록하듯 말이죠. 이처럼 자오 감독의 연출은 화려한 기술보다, 존재의 흔들림과 감정의 깊이를 조명합니다. 이는 신화를 해체하고 인간의 서사를 재건축하는 독특한 방식이며, 마블의 스펙터클 서사에 새로운 밀도를 부여합니다.

결론: 인간으로 남기 위한 신의 선택

《이터널스》는 신화적 존재들이 인간성과 윤리의 문제에 직면하며 겪는 갈등과 선택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우주를 구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터널스를 통해 신도 흔들리고, 감정에 흔들리며, 관계 속에서 존재를 재정의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인간과 공존하고자 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됩니다.

《이터널스》는 질문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사랑은 책임이 될 수 있을까? 힘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인가, 혹은 그 감정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인가?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 질문들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인물들의 표정과 선택, 그리고 침묵 속에서 드러냅니다. 인간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감당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마블의 세계관 안에서 가장 내면적인 히어로 서사를 완성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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